잠언맛나

주님을 경외(공경하고 두려워함)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영생이다.

가스펠 크리에이터 2024. 4. 2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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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9:7 교만한 자를 책망하는 자는 오히려 수치를 당하며, 악인을 꾸짖는 자는 오히려 오명을 입느니라.

잠9:8 교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혹 그가 너를 미워할까 함이요, 현명한 자를 꾸짖으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잠9:9 현명한 자를 훈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더욱 현명해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그의 학식이 더 늘어나리라.

잠9:10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이에 대한 지식은 명철이니라.

잠9:11 나로 인하여 네 날들이 많아질 것이며 네 생명의 연수가 늘어나리라.

잠9:12 네가 현명할지라도 네 자신을 위하여 현명하게 될 것이요, 네가 비웃을지라도 네가 홀로 그것을 감당하게 되리라." 하느니라.

 

 

이번에 소개할 잠언 본문은 어떤 사람들에게 훈계하는 책망과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를 교훈하며 또한, 주님을 두려워하면 지혜가 성장하고 영생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주면서 우리 성도들이 지혜롭게 되면 우리를 위한 것이며, 교만하게 진노하며 건방지게 비웃더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어 거만한 조롱이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즉, 다시말해서 교만한 자들을 가르치면 교만한 자들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짓밟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물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진주를 개돼지에게 주지말라고 하시면서 주게된다면 (먹이가 아니므로) 오히려 거룩한 진주를 짓밟고 돌아서서 우리를 찢을까 염려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다시 돌아서서 너희를 공격할까 함이라. 라고 하였으므로, 사악한 자들과는 말대꾸도 하지않는게 좋고 현명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복음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지혜로운 자들은 더 지혜로워지고 학식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41장 5-6절에, 의인으로 나를 치게 하소서. 그것이 친절이 되리이다. 그로 나를 책망케 하소서. 그것이 내 머리를 상하지 않게 하는 좋은 기름이 되리니, 이는 그들의 재난중에도 내 기도가 여전히 있음이니이다. 그들의 재판관들이 돌무더기에 내쳐질 때 그들이 내 말들을 들으리니, 이는 내 말들이 달기 때문이니이다. 라는 말씀처럼 정직한 꾸짖음은 이웃을 망하게 하지않고 오히려 친절과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경외(공경하고 두려워함)하는 것이 지혜요 거룩한 것(계명)을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욥28:28과 문맥이 일맥상통합니다. 욥기 28장 28절에, 또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주를 두려워함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 순종하는 것이라고 시111:10은 말씀합니다. 시편 111장 10절에, 주를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모든 자들은 좋은 명철을 가졌나니, 그를 찬양함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이 절대무한 무궁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조물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생명(영생)에 들어가려거든 계명들을 지키라'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9:17)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청소년들도 이해하기 쉽지만 실천이 어려워서 다들 난리통인 것입니다. 도덕관념 상실시대에 걸맞게 누구하나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은 희미해져 가고있고, 그야말로 노아홍수때, 지상에 폭력과 음탕함이 난무했던 롯의 때, 그리고 광야에서 먹을것에 불평 불만을 일삼으며 고기를 요구했던 모세의 때 등등의 역사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윤리를 많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지나친 자유가 주어지면 세상은 과연 행복할까요? 법과 도덕과 질서는 일종의 '안전장치'입니다. 즉, 무질서와 영혼의 피폐함을 막는 캡(한계의 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파도의 한계를 정하시고, 깊은 샘의 표면의 한계를 지정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경계를 침범하지 말라는 생명의 계명입니다.

 

도덕의 속박이 풀려서 많은 자유를 준다면 방종하기 쉽고 그 방종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특히 죄를 짓는 당사자들 스스로의 영혼을 파멸시킬 것이고, 영혼을 피폐하게해 진리와는 멀어지고 오로지 육체적 본능대로 막사는 짐승이 되어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심성을 버리고, 이기적 본능에 따라 막살 것입니다. 어느 진화론 과학자의 책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라고.. 제목만 봐도 짐승의 본능적 욕망과 유물론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성경 기록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있으며, 그 진화론 과학자는 신은 아마도 없을것이니 이제 걱정일랑 접고 인생을 즐기라며 대놓고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결국 그들이 무신론 주장하는 의미와 목적은 아주 뻔합니다. 기독교윤리에서 요구하는 선행에서 벗어나 인생을 마음대로 즐기는 것입니다. 사기도둑질 마음대로하고, 불륜간통으로 여러 여자들 거느리며 간음죄를 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육욕적인 그들의 주장은 결국 결론은 인생은 기껏 살아봐야 120세 정도로 짧으며, 인간은 짐승들보다 좀더 지성이 발달한 만물의 영장이지만, 동물과 하등 다를게 별로없는 정밀한 생명기계라는 것이라고 그들 진화론 과학자들이 설명합니다. 인간이 생명기계? 이것이 과학의 한계입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을 기계로 창조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학이론이라는게 오랜시간이 지나면서 허구로 드러나기도 하고, 시대흐름에 따라 낡은 이론이 되어 폐기되기도 하는등(외배엽 중배엽 내배엽 등 배엽론이 생물학에서 폐기되었다고 알려졌음.) 그야말로 과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는, 진실을 탐구하고 관찰하는 학문이긴한데, 과학은 진리가 아니며 주님을 경외해야 참 진리를 압니다.

 

그래서 주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그 주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성도들이 불로장생으로 장수(長壽)하는 절대무한 무궁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의롭게 사는 성도들에게 절대영원불멸이 있다고 잠언 말씀은 거듭 말씀합니다. 잠언 10장 25절에,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듯이 악인은 더이상 있지 아니하겠으나, 의인은 영원한 기반이니라. 라고 하였고, 잠언 12장 19절에,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설 것이나, 거짓말하는 혀는 순간뿐이니라.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조물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이미 절대불멸의 영생에 대하여 시편 잠언 등등에 거듭 기록되었고, 다니엘 12장 말씀에도, 무덤에서 깨어나 영생얻을 자들에 대해 오랜시간후 종말의 예언의 계시가 환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지혜롭더라도 절대무한 무궁영생과 천국상속유업을 얻기위해 즉 나를 위한 것이며, 교만한 진노로 거칠게 비웃더라도 그것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성도들 각자가 감당할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진실하며 겸손하면 재앙을 감당할 위험에서 피할 수 있습니다. 즉, 다시말해 선한 양심이 있어야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시편 145장 18-19절에, 주께서는 자기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자기를 진실로 부르는 모든 자들을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요, 그가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리로다. 라고 하였으므로, 지혜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주님을 경외하고 계명들을 지키는 신앙생활로 결코 쇠하지않을 절대영원무궁천국낙원을 상속유업으로 보상받는 저와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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